【 신토불이 우리문학 206 】
가실(嘉實)
이광수
책소개
〈가실(嘉實)〉은 1923년 2월 12일부터 23일까지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된 이광수의 단편소설이다.
때는 김유신이 한창 들날리던 신라 말이다.
가을볕이 째듯이 비치인 마당에는 벼 낟가리, 콩 낟가리, 모밀 낟가리들이 우뚝우뚝 섰다. 마당 한쪽에는 겨우내 때일 통나무더미가 있다.
그 나뭇더미 밑에 어떤 열예닐곱 살 된 어여쁘고도 튼튼한 처녀가 통나무에 걸터앉아서 남쪽 한길을 바라보고 울고 있다. ─ 〈가실〉 본문 중에서
가실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주인 노인더러 놓아 보내주기를 청하였으나, 주인은 본국에 돌아가면 도리어 생명이 위태하리라는 것을 핑계로 놓아주지를 아니하고, 또 지금 열여섯 살 되는 딸의 사위를 삼으려는 뜻을 가졌다.
원래 이 노인은 아들 형제를 다 전장에 보내고, 농사할 사람이 없어 가실을 종으로 사 온 것인데, 가실이 있기 때문에 농사를 잘하여 집이 부요해졌고, 또 가실의 사람됨이 극히 진실하고 부지런하여, 족히 자기의 만년의 일생을 부탁할 만하고 믿으므로, 아무리 하여서라도 사위를 삼아 본국에 돌아갈 생각을 끊게 하려 한 것이었다. ─ 〈가실〉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이광수(李光洙, 1892~195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이다.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안원대군의 후손인 이종원(李鍾元)과 어머니 충주 김씨(忠州金氏)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살 때 전염병으로 부모님과 가족들을 잃고 천도교에 입교, 1905년 일진회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유학갔다.
1908년 홍명희·문일평·안재홍 등과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해 《소년》을 발행, 이듬해 소설 〈노예〉, 〈사랑인가〉, 〈호(虎)〉를 발표했다.
1910년 《대한흥학보》에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고 계몽단체 광문회(光文會)의 일원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독립신문》과 《신한청년》 주필로 활동했다.
1922년 5월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도덕적 타락’이 한민족의 쇠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친일로 전향, 1939년 친일단체 조선문인협회 회장을 맡아 전선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를 주도했다.
1940년부터 해방 전까지 《매일신보》에 황민화운동, 창씨개명 정책,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징병제 실시 등을 지지하는 글을 게재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기소됐으나 석방되고, 1950년 6월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 만포에서 병사했다.
대표작으로 소설 〈무정〉, 〈사랑인가〉, 〈소년의 비애〉, 〈무명〉, 〈마의태자〉, 〈흙〉, 〈원효대사〉, 〈유정〉, 〈애욕의 피안〉, 〈할멈〉, 〈가실(嘉實)〉 등이 있으며, 전기 〈이순신〉, 〈안창호〉와 자서전 〈나의 고백〉 등이 있다.